차이나는 클라스, 역사학자 이익주, 고려의 폐행, 조선의 거울이 되다.
요 옷은 원간섭기 고려 지배층이 선택한 몽골식 의복이에요. 그 당시 복장은 아니고
변발 호복이라고해서 약 100년간 몽골식으로 머리를 자르고 몽골의 복식을 따름.
그리고 그때 신분, 능력에 관계없이 왕에게 아첨해 관직을 받은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은?
폐행이에요.
아름다운 사랑이 아닌 임금이 신하를 지나치게 사랑함. 왕의 편애를 등에없고 국정을 농단하는 폐행.
간신 그중 일부가 폐행인거에요.
고려 제 7대왕인 목종 때의 인물인 유행간이 있었어요.
목종과 유행간은 동성애관계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왕의 총애 하나로 권력을 행사. 철저히 왕에게 기생을 하면서 살음.
유행간, 최초의 폐행으로 고려사에 기록됨.
조선 세종때 편찬한 고려사는 1200여명의 전기가 담긴 139권의 고려시대 역사서에요.
나쁜 사람들의 전기를 포함. 악인열전이 있어요.
조선이 포착한 고려의 기이한 폐행.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일이 흔하잖아요.
고려 시대에 유난히 폐행이 많았나요? 특히 고려후기에 집중되어있음.
폐행전 55명 기록. 47명이 원 간섭기에 집중되어있음.
500년을 이어온 고려를 무너뜨린 원인이 폐행이에요.
고려의 원칙은 왕과 사적인 관계는 정치참여 금지.
통일신라, 진골이 관직, 권력을 독점. 하지만 진골귀족은 왕의 일가친척이에요.
왕족이 국정을 독점한 신라. 신라의 폐단을 딛고 세워진 고려는 종친은 정치에 참여할수 없다.
어느 순간 정상이 무너진 고려.
비정상의 시대를 연 첫번째 계기는 무신정변입니다.
고려 문벌귀족사회를 무너뜨리고 100년 동안 무신들이 집권.
100년동안 무신들이 왕을 살해, 폐위, 유배함
왕이 하게된 생각이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목숨 바칠 사람은 없을까."
개인적인 측근의 필요성을 절감함. " 천민이라도 내게 충성한다면..."
믿었던 사대부에게 100년간 발등찍힌
그리고 비정상의 시대를 연 두번째 계기는 원의 간섭.
그후 100년간 이어진 원 간섭기.
무신정권 말 약 30년의 대몽항쟁으로 피폐해진 고려.
무신들의 반대에도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한 고려 원종.
전쟁을 끝내겠단 의지로 태자를 몽골로 파견.
칭기즈칸의 손자인 원나라 제 5대황제 쿠빌라이 칸.
고려 왕실의 외교로 전쟁이 종식. 무신들은 계속 강화를 반대함. 급기야 왕을 폐위하고
고려원종은 원을 직접 찾아 제안을 함.
1, 원의 군대를 빌려주면 무신정권을 없애고 강화를 유지하겠다.
2. 양국의 평화를 약속하는 고려 태자와 원 공주의 혼인.
청병과 청혼을 함.
쿠빌라이는 찬성을 하게되고 그렇게 100년의 무신정권을 종결시킴.
1274년 고려의 태자와 몽골 칸의 딸이 결혼을 함.
고려시대의 그림 자료는 대부분 소실되었다고해요..ㅠㅠ 안타깝네요.
고려에 주둔한 원 군대를 철수, 감시관 다루가치를 폐지.
고려의 빛나는 생존 외교중 하나였다는 지난 강연의 주제.
오늘은 그 다음 이야기.
그렇다면 원나라는 점령군, 감시관, 전부 철수합니다.
그렇다면 원은 어떻게 고려는 통제하려 했을까?
원의 입김에 따라 언제든 왕위를 교체함.
원의 내정간섭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00년동안 이어온 원의 간섭기. 불안한 왕권이 만든 폐행.
이른바 폐행의 시대. 그 시작은? 충렬왕부터입니다.
몽골의 풍속을 따른 고려 왕실. 고려 백성은 충렬왕을보고 경악을 합니다.
고려 최초 국제 결혼을 한 왕으로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사위 그리고 원나라 공주가 2번째 부인임.
충렬왕 즉위 당시의 상황이 굉장한 압박감이 예상되죠
무신정권의 종말+ 원 간섭의 시작이에요. 국왕으로서 새로운 전환이 필요함.
즉위한 충렬왕의 첫 행동은 뭐였을까요?
충렬왕의 어버지인 고려 원종 폐위 사건.
원에서 목숨을 걸고 태자를 지킨 신하들. 무신정권에 의해 폐위된 원종.
태자는 당시 몽골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새 압록강에 도착했는데 태자를 잡으려 무신들이 기다리고 있었음.
왕과 태가자 모두 잡히면 왕실은 위태해지죠. 강을 건너 폐위를 알린 관노.
그덕에 급히 원으로 되돌아간 태자.
그렇게 풀려나 청병, 청혼 전략으로 혼란을 잠재운 원종.
고려 왕거를 구한 노비, 관노뿐 아니라 당시 충렬왕을 지켜썬 시종들.
하급무사, 통역관, 내료
폐위 소식을 알렸던 관노인 정오부는 노비출신으로 1등 공신에 책봉.
왕실의 안위가 위태로운 순간, 왕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들.
하지만 문제는 과했다는 거..!
과한 포상이 폐행의 시대를 열게됩니다. 왕의 전통적인 최측근.
또 하나의 숨겨진 최측근.
몽골에는 원래 없는 직책인 환관.
유목하며 돌아다니는 민족으로 몽골제국을 세우며 궁궐 살림을 꾸릴 사람이 필요했음.
중국역사를 보면 환관이 득세하면 나라가 망한다?
중국 제국들의 멸망을 지켜본 고려.
환관의 정치개입을 극도로 제한했죠. 직위 7품이 한계고 총 10명으로 제한.
원에서 환관들이 벼락출세를 하게됨. 원칙이 무너진거에요.
너도나도 나서서 거세를 하고 충렬왕의 환관인 최세연
원 공주의 총애 속에 득세한 최세연. 최고 관직인 상장군까지 출세하게됩니다.
왕의 마음을 잘 읽고 왕의 말못할 비밀까지 커버해주는 능력이 있었다고해요.
환관은 왕의 대나무숲임.
득세한 최세연에게 뇌물을 공세함. 관직, 승진청탁, 재판 뒤집기!!
뇌물만 주면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기도함. 국정 농단의 원조죠.
사나운 개를 키웠던 최세연. 충렬왕의 고모인 수흥궁주의 하녀를 물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게됩니다.
왕실 어른의 불호령.
환관 최세연의 반응은?
하늘을 찌르던 환관들의 기세. 충렬왕은 측근기구까지 창설함.
응방의 탄생은 원에서 고려의 매를 요구했고
원에 바칠 매를 잡고 훈련하는 관청인 응방. 충렬왕의 취미또한 매사냥인데
매를 빌미로 왕에게 접근을 함. 매를 앞세워 응방에 채용.
점차 국왕의 친위대로 탈바꿈한 응방.
박의. 진귀한 매 컬렉터임.
직접 원나라에 간 박의.
원나라 황제인 쿠빌라이 칸에게 진상을하고
고려 대장군에 셀프 임명을 함.
그리고 또한명 이정. 전직이 개 잡는 사람임, 개백정.
충렬왕 유모의 사위가 되어 접근을 함.
사리사욕으로 뭉친 응방 4인방.
충렬왕과 함께 매사냥을 가면 친위대로 행세를 하고 내료, 환관, 응방등 측근에 기대 정치를 펼친 충렬왕.
정식절차를 거친 인사 대신 소위 문고리 권력.
왕과 개인적 친분으로 등용을 함. 정상이 무너진 원 간섭기. 폐행의 시대.
그런데 아버지 원종도 몽골에 다녀온 뒤 시종들에게 쌀로 포상을 함. 보너스만 주고 끝.
원에서 봤던 예시가 있던거에요. 몽골풍습에 칸 중심으로 측근을 형성.
태자시절 원에서 케식을 본 충렬왕은 고려에 그대로 복붙함. 그게 바로 응방인거에요.
몽골의 케식은 귀족들의 자제로 구성된 엘리트 모임이에요. 귀족집안 출신임.
몽골 문화에 적합한 제도죠. 유목민족의 풍습인 케식.
조기유학갔다가 잘못 배워움.
폐행의 반격. 고발한 사람이 파직또는 유배당하고 심지어 처형까지.
국왕에게 아첨하는 사람만 남게된 고려. 관료만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충렬왕의 주니어인 세자.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이에요. 1283년 세자 나이 겨우 9살.
9살짜리의 바른말. 초등학생도 아는 폐행의 악덕.
충렬왕의 권좌에 켜진 비상등. 1294년 장인 쿠빌라이 칸의 죽음.
이어서 1297년 아내 몽골 공주도 죽음.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의 사망. 어머니 사망 소식에 달려온 세자.
충렬왕의 후궁인 무비 백야단. 별명이 도라산이에요.
경기도 파주의 도라산. 개성에서부터 원정을 가는 사냥 맛집인 곳이에요.
매사냥 찐덕후 충렬왕. 사냥마다 무비가 동행하자 붙여진 별명인 도라산.
세자가 , 무비를 처형. 충렬왕 주변의 환관이 4명.
환관 최세연을 비롯해 4명을 처형하고 40여명을 유배함.
피의 복수를 단행한 세자. 23살 혈기 왕성하던 때. 아버지의 퇴위를 추진
이듬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가 왕으로 즉위함.
원을 움직여 책봉을 받은 세자. 고려의 26대 왕 충선왕이 됩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우며 출발을 함. 충선왕은 공부도 좀 함.
학자들을 가까이하고
황금 씨족이라 불리는 몽골 황실 혈통임.
동시에 원 공주와 혼인해 원의 부마가 됌. 다이아수저에 혈기왕성하고 정의감이 넘침.
아버지와 다른정치를 하겠다!! 즉위 교서를 발표합니다. 30 여 항의 개혁 조치.
고려 국정을 정상화시키자. 모두가 대환영함.
신하 ,백성의 지지속에 개혁을 단행함. 하지만 8개월만에 중단하게 됩니다.
원을 상대로 충렬왕이 외교를 함.
결정타는 뜻밖의 인물에서.
충선왕의 최측근인 아내 계국대장공주.
충선왕의 5번째 아내로
갑자기 원의 황후에게 편지를 씁니다.
고려로 시집간 원 공주의 애통한 편지.
원 황실은 충선왕 지지를 철회하고 8개월 만에 충선왕을 폐위시킴.
원나라가 움켜진 고려 국왕 책봉권의 실체임.
충선왕이 물러나고 누가 즉위했을까? 충렬왕의 컴백. 폐위된 충렬왕이 복위하며 혼란에 휩싸인 고려.
충렬왕도 탐탁진 않았겟지만 원나라는 충선왕이 더 문제였던 것.
충선왕의 개혁이 원과 상의 없는 독자적 결정이었음
이때 충선왕은 측근이 있어서 아내의 편지를 막았다면..?! 또 다른 측근이 원 황후를 설득했다면?
측근의 필요성을 실감한 충선왕.
자신의 편지로 남편을 폐위시킨 원 공주.
공주의 편지는 일종의 자해로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고함. 굴욕적인 사건이었음.
왕위에서 물러나 원으로 간 충선왕.
하지만 배경은 여전히 빵빵해요. 원 황족들과 인맥쌓기.
원의 유력한 계승자인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 형제가 있는데 두 형제와 교분을 다진 충선왕.
10년뒤 원황제가 죽고 황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일어나고
직접 내전에 가담한 충선왕.
2대에 걸쳐 원의 황제에 오른 형제.
형제의 황권과 함께 원의 실력자로 부상한 충선왕. 일등공신이 됨.
같은해 고려에서 충렬왕이 승하하게되고 그토록 바라던 금의환향. 고려왕에 복위한 충선왕.
10년만의 복위.
고려에 있을까? 원에 있을까?
고려왕을 하려면 고려로 가야하는데 고려로 돌아오기엔 원에서 얻은 지위가 물거품이 되는거에요.
충선왕의 선택은?
복위식만 치르고 원으로 돌아감.
원에서 생활하면 최초로 비대면 통치를 하게됨.
서면으로 한계가 있으니 누군가 왕을 대행할 필요가 있죠.
왕의 마음을 잘 읽는 환관. 또다시 측근에 의존하게 됩니다.
충선왕 측근와 충렬왕 측근의 차이는 자격이 없는 내료, 환관, 응방이 아니라 과거에 급제한 엘리트들임.
원에서 함께 생활한 사대부를 고려왕의 대행으로 파견. 하지만 어쨌든 폐행임.
실력있는 막강한 폐행의 출현. 개혁 정신을 잃은 충선왕.
원나라에서 충선왕에게 요구를 합니다.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충선왕의 픽은 심양왕. 고려는 아들에게 양위하게됨.
측근을 통해 아들을 감시하고 원의 간섭 속에 비정상이 횡행하게되죠.
측근정치의 출현은 왕이 자주성을 잃은 상황이에요. 외세에 흔들릴 때 나타나는 기형적 형태임.
충선왕의 말년엔 원 내부 정쟁에 휘말려 티베트로 유배를 가게됨.
더 극심한 혼란속으로 빠지게됩니다.
충선왕이 뿌린 씨앗. 원의 정치에 개입한 고려 국왕.
고려의 정치에 원이 개입할수도. 충렬왕은 폐행을 싹 틔웠지만 원의 개입은 차단.
원의 실력자가 되어 고려의 안정을 꾀한 충선왕.
힘이 없어지면 반대로 원의 공세에 시달려 안좋은 선례가 됨.
이후 원 정치가 어지러워질 때마다 고려의 왕권까지 위태하게됨.
충렬왕인 아버지보다 더 측근정치에 의존한 충선왕.
원 간섭기동안 측근정치의 폐단을 경험. 관료 시스템의 붕괴. 관료시스템의 역할이
적격자를 선발해 평가를 통한 포상과 징계가 이루어져 업무동기부여를 해야해요. 개백정 출신 폐행이 내 상관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공정, 정직이 사라진 관료사회가 되는거에요.
측근의 기반은 왕과의 사적 친분이에요.
왕이 바뀌면? 물갈이가 되는거죠. 왕이 바뀔때마다 혼란스러워짐.
밀려난 전왕 측근들이 살길은?
원의 행성을 만들자고 책동.
원은 고려를 직접 통치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원은 간섭과 교란이 훨씬 유리해요.
가장 큰 피해자는 고려의 백성들이에요. 폐행들이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들의 땅을 갈취함.
폐행이 두려워 관리들도 방관함. 땅을 강탈당한 백성들.
빼앗긴 땅과 함께 노비가 되거나 떠도는 사람이 급증하게됨.
당시 고려 문인들의 기록을 보면
국지불국.
고려의 새로운 희망은 공민왕이에요.
공민왕은 선생님의 최애 픽임.
공민왕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암담했던 고려에 한줄기 빛을 던진 왕임.
고려를 되살리는 개혁을 멈추지 않던 왕. 반원 자주의 횃불을 들고 고려의 개혁을 굳건히 이끌어감.
죽음마저도 암살. 목숨을 걸고 고려를 개혁한 뚝심왕임.
40년동안 500여회 침입 기승을 부린 왜구의 약탈.
중국의 피해도 극심해 고려가 막아주길 바랐던 원.
어린왕으론 불가한 일이죠.
반원의 기미를 숨긴 공민왕.
즉위후 정세를 살핀 공민왕은 옛날의 원나라가 아님을 알고 친원 세력을 몰아냄.
당시 친원파의 중심인 기황후.
기황후 일족의 극심한 횡포 특히 오빠였던 기철. 왕을 보고도 본체만체하고
기철은 고려를 없애고 원의 지방으로 하자고 주장함. 기회를 엿보던 공민왕은 즉위 5년 반원 운동의 기치를 세움.
1356년 5월 18일 단 하루에 잔치를 가장하여 기철 세력을 한곳에 모아 처단.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빼앗겼던 철령이북 영토 회복.
이 모든일을 단 하루에 다 해버림.
친원 세력 일망타진 대성공!
몽골 제국 몰락에 영향을 준 고려의 반원 운동.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공민왕은 이제는 개혁차례.
여기서 딜레마에 빠집니다. 원에 맞선 공민왕의 손과 발이 된 사람들은?
원에서 10년간 볼모생활을 공민왕과 함께한 사람들. 그렇지만 측근들이 없었다면 공민왕의 반원운동은 불가능했죠.
공민왕의 딜레마. 특단의 결심을 한 공민왕.
반원에 앞장섰던 측근들을 해체하고 약화시킴. 최측근 관료인 김용이 공민왕 암살을 시도하기도함.
계속된 목숨의 위협 속에도 개혁을 이어간 공민왕.
신돈의 원래 직업은 승려죠. 기존 세력들은 부적합함.
기득권이 없는 사람을 등용해 고려를 개혁하겠다. 개혁 불도저인 신돈. 부당하게 뺏긴 토지를 회복시켜주고 노비가 된백성을 신분회복시켜줌.
원간섭기 이후 처음으로 성공한 신돈의 개혁. 신돈의 개혁에 밑바탕이 된 공민왕의 강력한 지원.
좋은측근, 나쁜 측근이 따로 있나요>?
공민왕의 측근은 좋은 측근?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하게됩니다. 공민왕과 신돈 두사람 다 초심을 잃게됨.
신돈의 개혁이 가능했던 배경이 관료시스템보다 공민왕의 개인적 신임에 기반을 했기 때문에
신임이 무너지면 곧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신돈이 권력을 잡자 뇌물과 청탁이 쏟아지게됐고 결국 변절하게됨.
신돈을 모함하는 자들도 출현함.
신돈이 왕이 되려한다!!
공민왕에겐 가장 치명타죠. 권력을 두고 멀어진 두사람.
의심이 커진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 그래서 신돈을 앞세운 개혁도 실패하게됨.
체계적인 시스템 대신 개인에 의존한 개혁의 한계. 절박해진 공민왕의 마지막 선택은 케식을 닮은 최측근 기구인 자제위.
결국은 자제위의 손에 암살을 당했죠.
공민왕의 개혁이 없었다면 조선 건국은 불가능했을 것.
그후 폐행보다 더한 권신의 출현. 권신은 국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흔드는 신하를 말해요.
폐행의 시대가 권신의 시대로. 설상가상 권력 그 자체가 된 신하들.
철저히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함. 고려가 멸망의 길로 가게됩니다. 고려의 문제는 고려 스스로 해결해야해요.
권력의 사유화 금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
정도전의 생각이 조선 정책의 기틀이 됨.
승지와 사관이 늘 옆에 있어 비밀리에 독대가 사실상 불가능함.
2. 왕을 감시하는 기관인 언관과 삼사.
3. 환관의 정치개입을 원천봉쇄함.
명나라 말기엔 환관만 약 10만명이었어요. 전체 관리보다 환관이 더 많았음.
조선왕조 500년 동안 악명을 남긴 환관이 없습니다.
고려를 거울로 삼은 조선의 정치.
1. 왕과 신하의 독대금지.
2. 언관과 상사가 왕을 감시.
3. 환관의 정치개입봉쇄.
이를 없앴던 왕이 있죠. 연산군.
연산군의 후광아래 국정을 농단한 임사홍. 결국 조선의 선택은 반정이었죠.
원칙이 흐트러지면 폐위를 불사하고 바로잡는다.
고려와 조선 1000년의 시간동안 권력의 사유화를 경계하고 공공의 정치라는 역사를 만들어 온 한반도.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DNA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왕이 잘 살펴야 한다. 지금은 국민이 주인인 시대.
정치와 권력을 살피는건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고려의 폐행으로 우리의 거울로 삼자.
요런 재미진 강의 넘나 좋아요~ 앞으로도 다양한 주제로 많이 해주면 좋겠어요.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