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이 청혼을 했지만 나혜석이 거절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미 한 번 혼인했던 김우영, 전처와는 사별을 했고,그리고 전처와의 사이에 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혜석과 김우영의 나이는 무려 10살 차이가 났다고해요.
김우영의 열정적인 고백에 조금씩 마음이 흔들린 나혜석,
고민에 빠진 나혜석이 제시한 결혼조건이 있는데 김우영이 깜짝 놀란 파격적인 결혼 조건의 내용은? 무려 결혼 조건이 네가지입니다.
축첩 제도가 성행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죠.
살림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을 이어가겠다는 것.
당시에 시부모를 모시는 것은 절대적인 의무였죠. 시집살이 하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조건!!
네번째 결혼 조건은 신혼여행은 나혜석 첫사랑의 무덤으로.
김우영을 만나기 전 나헤석이 열렬히 사랑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수용한 김우영을 보고 결단을 내린 나혜석. 청혼을 승낙하고 결혼을 결심합니다. 두사람의 결혼 소식에 떠들썩해진 경성.
그렇다면 실제 결혼식 장면은 어땠을까?
1920년 4월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사진.
두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곳은 현재도 남아있는 정동교회라고 해요.
결혼식도 파격적으로 치른 조선의 신여성 나혜석. 그리고 결혼 후에도 계속 이어간 자신의 미술 경력.
결혼 3개월 뒤 나혜석 부부에게 찾아온 소중한 선물. 만삭의 몸을 이끌고 경성을 뒤흔든 나혜석의 행보는?
조선 여성 최초로 서양화 전시회를 개최한 나혜석.
전시회를 통해 조선의 서양화가로 입지를 확고히 한 나혜석. 1921년 9월 나혜석이 경성을 떠나게 됩니다.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 되어 중국 단둥으로 발령이 난 것. 또 다시 나혜석이 파격적인 글을 씁니다.
모된 감상기 1923년 1월. 나혜석이 여성 입장에서 발표한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요.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모된 감상기. 모성애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써 내려간 거에요. 모성은 여성의 본능이라고 여긴 1920년대 조선.
나혜석은 모성은 육아를 하면서 생기는 감정이라고, 최근 연구 결과 모성은 여성의 본능이 아니고 강요된 규범이라는 분석이 있다고 해요. 나혜석은 모성애에 담긴 본질을 간파하고 있었던 거죠. 사회적으로 강요된 모성애를 비판한 나혜석.
세상이 정한 틀을 거부하고 금기를 깨부순 나혜석.
바로 독립운동입니다. 중국에서 의열단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나혜석.
총기 등을 숙소에 숨겨주고 경성으로의 무기 반입을 도와준 것. 무기 반입을 위해 나혜석이 가방에 붙여준 것은?
독립운동에 남편의 신분을 적극 이용했다고해요.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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