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는 조선의 민란, 실패한 혁명인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혼란해진 조선. 다사다난했던 조선을 지탱한 사람들.
우리 역사의 주인은 민중이죠.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은 민초들의 저항임.
침략한 외세에 대항하고 부패한 지도층에 항거하며 나라를 지켜온 사람들 백성.
조선후기 일어난 민란이 130여건이에요. 백성은 왜 민란을 일으켰나. 그들이 꿈꾼 세상은 무엇이었나.
조선시대 민란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되돌아봤으면..
두분의 질문이 바로 오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함.
생존투쟁으로 시작된 민란. 조선을 뒤흔든 혁명이야기.
백성들이 어지럽게 했다.
민란은 지배자 시각에서 쓰인 표현이에요. 생존을 위한 투쟁인데 민란이 실패했다고 하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끊임없이 민란이 일어났지만
제도적 변화를 끌어내는데 실패함. 체제 모순과 부패를 도려내지 못한 한계. 민란의 역사를 실패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으나 꺾이지 않은 새 나라에 대한 열망. 민란, 조선 후기 혁명의 불씨가 되다.
모두가 동등하게 어울리는 공간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이곳은 어디일까? 신분과 관계없이 토론을 벌이는 그리스의 아고라같은곳.보다 훨씬 대단한 곳임.
집강소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후 전라도 53개 읍에 설치된 기관임.
농민이 뽀ㅃ은 대표자가 그 마을을 통치. 동학농민혁명 이후 정부가 제시한 타협안.
국가가 공인했던 집강소. 백성이 투표로 마을의 대표자를 선출. 조정에서 파견한 기존의 수령들은 부수령의 역할만 함.
오늘로치면 지방자치제도인거에요.
노비와 상전, 백정과 양반, 여자와 남자
신분제도를 타파한 공간임.
영어로 모임을 팀이라고 하듯이 팀장님 회장님처럼
접= 지금의 팀과 비슷함.
끝까지 꺼지지 않은 민란의 불씨. 동학농민혁명으로 타오르다.
마침내 백성의 승리로 얻어낸 집강소.
집강소는 조선 역사상 민란이 이뤄낸거임.
약 100년동안 건국이후 비약적 발전을 이룬 조선. 조선의 성군인 세종대왕.
백성을 위하는 훌륭한 임금도 있었지만 연산군 대 1494년 조선이 흔들리기 시작함.
연산군 이후부터 민란이 빈발.
박포의난은 2차 왕자의 난으로 1400년 무신 박포와 태조의 넷째 방간이 이방원을 공격한거에요.
민란이 아닌 무신이 일으킨 왕자 간의 싸움임.
이시애의 난은 1467년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한 무신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이에요.
역시 백성이 아닌 무신이 일으킨 정변임.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민란임.
최초의 민란의 주인공은??
조선왕조실록에 열번이상 등장함.
허균이 썼다고 알려진 홍길동전.
모델이 있었겠죠. 홍길동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을 함.
실록에 홍길동의 구체적인 신분이 나오진 않지만
서자의 한이 서린 일화가 나와있음.
연산군 시대 홍길동이 나타난 배경은 토지제도의 문란때문이에요.
이전까지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관리했는데 연산군때부터 양반이 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함.
백성의 토지를 탈위하고 개간해 토지를 잃고 유랑민이 된 백성들이 무장한 도적으로 변신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도적이 홍길동이에요.
홍길동의 뒤를 이은 민란의 주모자는?
명종시대 백정이었던 임꺽정, 숙종시대 광대였던 장길산.
천민 중의 천민이었던 백정과 광대. 민란을 일으킬 수밖에 생존을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임꺾정과 장길산.
백성들이 꽁꽁 숨겨주다보니 포도청에서 아예 잡지도 못해요. 임꺾정은 군대를 동원해 간신히 체포.
영원히 잡히지 않은 장길산.
백성들을 대변했던 민란. 흩어지면 백성, 뭉치면 도적! 명종실록 26구너 15년 12월 2일 중.
이때까지 혁명이라기 보다는 살려달라는 외침에 가까웠던 조선 초기 민란.
갑자기 토지를 잃은 백성들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겠으니 도적으로라도 인간답게 살아보자.
조선 중기이후 바뀐 민란의 성격. 생존투쟁을 넘어서서 새 나라를 향한 열망으로 진화함.
혁명의 불씨가 켜진 1674~1720년 먹고살기가 최악이었어요.
1695년 숙종 21년부터 대기근이 발생함. 각종 자연재해와 유행병으로 6년간 142만여명이 사망함.
전체인구의 약 25%임
조선 역사상 전례 없는 참혹한 시기에요.
먹고 살길이 없으니까 아이를 나무에 묶어 버리는 일이 빈번해짐.
권력 다툼만 했던 지배층. 노론, 소론, 남인.으로 당파간 정쟁이 치열했던 시기임.
백성을 위한 정치가 불가능함. 이미 지도층에 대한 신뢰는 추락함. 백성들도 조금씩 의식 수준이 높아져
1592년 임진왜란때 궁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를 보고 왕의 가마에 돌을 던진 백성들
나라를 도탄에 빠트렸으니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남한산성으로 도마안 인조.
왕비와 왕자는 강화도로 피난을 감. 왕비가 김포 앞바다에서 배를 타려고 할때
왕비의 배를 잡고 매달린 백성들. 무능한 기득권에 실망한 백성들. 이것을 확실히 보여준게
청 황제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한 인조.
기득권의 한계를 목격하며 점차 성장한 민중.
숙종 대 대기근이 닥치며 민중의 저항 의식이 폭발을 함. 조선 최초로 새 나라를 꿈꾸는 혁명 세력이 등장함.
조선 최초로 혁명을 시도한 승려 세력.
조선시대는 유교사회죠.
철저히 소외됐던 승려들은 명종대 승려시험인 승과가 부활을 하고
유명한 승려들이 등장하기 시작함.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 선조의 요청에 의해 3300여명 승병을 일으켜 활약을 함.
목숨 걸고 싸웠지만 여전히 홀대받은 승려.
조선 후기 민란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을 함.
지식인층이 결합돼야 민란이 혁명으로 발전하는데 승려는 문자를 읽을수 있는 지식인이에요.
귀족과 대립하며 프랑스 혁명의 선두에 선 부르주아 지식인층.
조선에서는 승려가 혁명의 사상을 전파. 무리를 이끌고 민란을 꾀하는 승려들?
당시 이런 승려들을 뭐라고 불렀을까요?
흔히 중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잖아요.
떼, 무리를 의미함.
무리를 거느리고 민란을 꾀하는 승려인 땡추.
땡추, 조선 최초로 혁명을 시도하다
가장 대표적인 땡추가 등장합니다. 숙종시대 혁명을 주도한 숭려.
조선 최초 혁명의 주인공으로 강원도 대장장이 아들 출신임.
가난하게 살다 승려가된 여환은 강원도 천불산에 들어가 수행하던 중
3개월 수행 끝에 대중 앞에 나타난 여환.
미래의 부처인 미륵신앙을 내세웠던 대표적인 인물이 궁예에요.
미륵신앙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한다는 신앙이죠.
신분차별없고 모두가 평등한 미륵세상. 모든 모순과 고통이 다 사라지는 시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백성의 종교였던 미륵신앙.
마을마다 미륵 불상을 세우고 기도를 해서 미륵 신앙을 여환이 혁명에 이용하기로 했는데..
혼자서 혁명할수 있습니까? 혁명 세력이 필요함. 이때 독특한 생각을 한 여환.
처음 포섭한 세력이 무녀집단인거에요. 조선시대 많은 무녀가 존재하는데
한국 불교의 독특한 체계가 있는데.
무속신상에 의지했던 조선의 백성들.
황해도에서 명망 높은 무녀 원향과 결혼한 여환.
용을 다스리는 용신을 모신 무녀 원향과 미륵의 계시를 받은 승려 여환.
당시 승려와 무녀의 결혼을 이상하게 보기보다
승려 무녀 백성이 모여 새 세상을 꿈꾸다.
여환이 7월에 큰비가 퍼붓듯 쏟아지리라고 예언을 함.
비가 내리면 용이 승천한다고 생각을 함. 비오는 날이 거사 이데이인데
도성 진격 작전을 합니다. 양주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한양에 가서 임금을 제거할 계획을 세움.
1688년 7월 15일 여환과 원향은 참모들을 끌고 한양에 잠입을 함.
여성이 혁명의 주체가 된 순간이에요.
여환과 동등하게 혁명을 이끈 원향.
마침내 결전의 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여환 세력.
무장까지 하고 도성에 잠입했는데 실패한 이유가 뭘까요?
비가 오지 않아서...ㅠ
때를 기다리며 북한산에서 제사를 지낸 여환부부. 거사날은 다가오는데 비가 안옴.
비가 와야 새 세상이 도래하는데.. 하늘이 때를 허락지 않는구나 라며 낙담하고 철수한 여환.
해가 동쯕에서 뜬다거나... 지금들으면 황당하죠.
백성들이 믿고 잘 따랐을까요? 지금보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만큼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었다는 이야기에요.
허망하게 실패로 돌아간 평등 사회라는 여환의 꿈.
종로 사거리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동상.
조선시대 죄수들의 사형터였던거에요. 사지가 잘려 죽은 여환.
혁명을 하려면 거대한 이념이 필요하고 나라를 뒤엎을 정도의 단단한 사상적기반이 있어야합니다.
이념이 무너지면 혁명에 실패할수밖에 없음. 미륵사상 다음으로 유행했던건
민란의 지침서인 정감록.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정감록.
계룡산에 수도를 둔 새나라에서는
집집마다 인삼을..! 그때는인삼이 엄청나게 귀한거죠.
죽은자도 살리는 약으로 여겼던 인삼. 조선시대 인삼은 누구만 가질수 있어요?
왕과 부자들만 가질수 있었던 인삼. 그만큼 나라가 풍족해진다는 뜻이에요.
모두가 평등하게 풍요로운 이상 사회. 미륵신앙의 이상 사회를 구체화한 정감록. 정감록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수많은 민란과 역모 사건의 배경, 나라에서 금지한 예언서임.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한 두왕이 있죠. 그럼에도 탐관오리는 존재함.
이계심의 난이에요.
황해도 곡산에서 살았던 이계심은 당시 곡산의 부사가 엄청난 탐관오리였음.
당시 곡산의 인구가 2천여명인데 어른 아이 다 포함해서 2천여명임.
천여명을 끌고 관아로 쳐들어간 이계심.
수령에게 항의를 합니다. 군대까지 동원해 진압이 되고
조정에서 난리가 났죠. 정조도 깜짝 놀란거에요. 그래서 정약용을 곡산 부사로 임명함.
정약용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은 이계심. 관아로 데려가 이계심의 이야기를 경청한 정약용은
의로운 일을 했다고 평가해줌.
다산이 정조에게 보고하기를 이계심은 무죄입니다. 그를 곡산의 아전으로 활용해야한다고함.
정조도 인정함.
만약 다른 시대 같았으면 다산도 그런 판결 내리기 힘들었을 거고 왕도 그런 판결을 인정하지 않았겠죠.
민란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남달랐던 정조.
민란을 억누르기만 하지 않고 민란에서 깨달음을 얻은 두왕. 영조와 정조.
탕평책을 비롯한 정책적 변화를 실천했죠.
왕만잘한다고 해결되지 않죠.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며 백성을 수탈함.
1800년대 순조대 정감록을 중심으로 민란의 시대가 도래되었죠.
본격적인 민란의 시대. 대표적인 민란이 서북지역에서 발생함.
정감록 유행의 진원지인 서북지방. 오랑캐같이 홀대받던 서북사람들.
조선 건국한 이성계가 함경도 출신이기에 서북 지방 군사들을 끌고 역성혁명에 성공했죠.
이성계의 후손이지만 이후 집권층이 서북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킬 위험세력이라며 서북 사람들을 관직에서 배제해버림.
서울사람은 스무명씩 과거에 합격해도 서북민들의 급네는 하늘의 별 따기임. 급제해도 등용이 안됌.
이런 사람들이 등용되면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킬 거다.
심지어 곡창지대여서 수령의 착취가 특히 심했던 평안도. 당시 가장 인기 있는 관직이 평안감사일정도라고.
등용길이 막힌 서북지방 지식인들이 훈장이 되어 평민에게 지식을 전수함.
서북지방 평민의 지식수준이 상승되고 백성 스스로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 것.
평민이 혁명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고 대표적인것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에요.
엄청난 일이 생긴겁니다.
평안도출신의 평민 지식인으로 민란을 주도한 홍경래.
입신양명하려고 과거를 봤지만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로 과거에 계속 낙방을 함.
그래서 과거를 포기하고 혁명을 꿈꾸기 시작함.
각지를 돌며 함께할 유력자를 포섭. 돈많은 사람, 한 많은 사람.
양반 평민 노비 대장장이 모든계층이 다 모여서 십년동안 혁명을 준비합니다.
10년동안 사람을 모으고 또 혁명 사상이 있어야 하잖아요. 정감록!!
정감록을 기반으로 혁명을 준비한 홍경래. 마침내 혁명을 시작합니다.
각 지역 관아를 점령하고 백성에게 곡식을 내준. 평안도에 위치한 약 4km 둘레의 정주성.
평양성 다음으로 큰성이에요. 1811년 12월 정주성을 점령합니다.
백성이 큰 도시의 성을 점령한 것은 엄청난 일이에요. 조선 조정에서 난리가 났죠.
8천여 군사를 동원해 정주성을 포위함. 패퇴해야할 상황에 4개월 이상 버틴 봉기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합류함.
함께 저항하며 농성전을 벌인 백성. 결사 항전의 의지로 관군과 싸운 백성과 봉기군. 관군의 힘이 더 클수밖에 없죠.
화약과 최신 무기를 가졌던 관군. 관군 취후의 전략은
성벽 아래 화약을 매장해 폭파함. 마침내 함락된 정주성.
1812년 4월 19일 관군의 총탄에 맞아 숨진 홍경래. 정주성에서 체포된 1917명. 모두 참수형에 처함.
비록 홍경래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홍경래는 죽지 않았죠.
다시 돌아와 새 세상을 열리라. 백성들의 믿음속에 살아있던 홍경래.
1800년 이후 순조의 외척 세력인 안동김씨가 득세했는데 관직을 사고팔고 백성을 수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본전보다 더 뽑아야하니깐 백성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함.
군포는 양인 남성 16세에서 60세까지 군역 의 의무를 대신해 내는 세금인데 양반은 제외임.
갓태어난 아기나 심지어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까지 임신부한테도 군포를 부과함.
죽은 사람에게 부과하기도하고 백골징포라고하죠.
당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 있는데
바치춤을 내린채 낫을 든 사내.
모두 실화라고하네요..ㅠㅠ
1803년 가을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지에서 목격한 사건임.
가난한 농가에서 아들을 낳은 여인. 남자아이니 군포를 납부하라고함.
다 빼앗겨서 더이상 줄것도 없다면서 농사를 지을 소까지 수탈해감.
나는 더이상 남자가 아니니 나에게 군포를 부과하지 마라.
수탈당한 백성의 처절한 선택이라 그 비극적인 이야기.
조선 8도에 만연했던 수탈. 다산 정양욕이 시로 기록함.
너무나 불공전한 사회임.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백성의 삶. 그 남편은 아마 사망했을거라고.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살 가능성이 희박하죠.
이것은 결국 죽음으로서 항거한 행위이죠. 정약용의 시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요.
전국적인 민란의 시작.
1862년 철종 13년
철종 13년 1862년 임술민란.
비교적 북쪽은 조용한 이유는? 홍경래의 난때 너무많은 탄압이 있었기 때문임.
산발적으로 일어난 민란. 임술 민란의 취약점은 37건의 전국민란으로 백성들이 조직적으로 뭉쳐서 일어났다면
엄청난 세력이 되었을 텐데 전체를 이끄는 지도자 없이 각 지역별로 산발적으로 발생함.
조세개혁등 사회변혁에 실패함. 민란이 실패했다는 평가는 이런 부분때문이죠.
끝없이 좌절해왔던 조선시대 민란의 역사. 그러나 바람에 누웠다 다시 일어나는 풀처럼. 꺾여도 꺾여도 꺾이지 않는 민중의 힘.
그러나 백성들이 그 실패로 끝냈겠습니까?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는 백성의 의지. 그 의지는 어떻게 다시 일어났을까
1894년 동학농민 혁명
마침내 전국적으로 연계된 민란이 발생함.
1894년 3월 전라북도 고부에서 시작.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이 원인이 됨.
당대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친척으로 한번 임기를 마치고도 또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음.
백성들이 거부 투쟁까지 햇는데 막을수가 없었어요. 다시 백성들을 수탈함.
필요없는 저수지를 새로 만들어 비싼 물값을 걷기까지함. 학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대표로
조병갑에게 단체로 감세를 탄원함. 조병갑은 가혹한 매질로 대응을 함. 고문 끝에 한달만에 사망함.
더욱 심해진 조병갑의 폭정. 조병갑은 더이상 우리의 수령이 아니다.
1894년 1월 고부민란이 발발합니다.
동학농민군의 목표는 전주성 격파와 서울진격임.
부정부패를 일삼던 민씨 세력을 타도하는거임
왕비와 더불어 최고의 권세를 누린 민씨 일가.
권력을 독점하고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른 세력.
동학농민혁명이 조직적이고 강력한 투쟁으로 번진 이유는
지금까지 민란의 기반이 됐던 사상들은 미륵신앙, 용신앙,정감록등이잖아요.
이모든것을 어우르는 새로운 사상의 탄생. 동학인거에요.
사람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가졌으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다.
모든것을 어우르는 새로운 사상인 동학
사람이 하늘인 나라를 꿈꾸며 조선 최후의 혁명이 일어나다.
4월7일 황토현 전투는 만여명의 농민과 관군의 치열한 접전임.
동료의 죽음을 보지 않으려 옷깃을 물고 전진했던 동학군.
조선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이죠.
홍경래 봉기군의 정주성 점령보다 더 위대한 승리였다고 조선 왕족의 뿌리인 전주는 왕의 고향에 동학군의 깃발이 솟아오른 것.
조정이 발칵 뒤집힙니다.
농민 통치 기구 집강소를 세우고 12가지 폐정 개혁을 시행함.
백성이 선출한 집강이 마을을 통치하고 고종과 명성황후가 동학군 집압을 위해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함.
권력을 지키기 급급해 외세에 침략의 빌미를 준 왕과 왕비.
텐진조약으로 당시 청나라와 조선에 동시 파병 조약을 맺었던 일본.
1894년 5월 6일 이를 빌미로 일본군도 조선에 군대를 주둔함.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동학 농민군은 다시 봉기함.
1894년 9월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가 일어납니다.
20여만 동학군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공주로 진격을 함. 충청도 공주의 우금치 고개.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대패를 함.
결국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으로 끝났으나 민초의 의지는 이번에도 꺾이지 않았다.
동학군의 후예가 항일 의병으로 활약을 하고 동학군이 패배한 후 해산한 군인과 동학군 출신들이 함께 연대해서 항일의병에 투신을 함.
독립군의 이름으로 봉오동전투,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함.
뭉치면 도척 흩어지면 백성.
흩어지면 백성, 뭉치면 의병!
도주를 우려해 전봉준의 다리를 부러뜨린 일본군. 들것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는 장면이에요.
전봉준 장군의 눈빛 한번 봐보세요.
우리의 전쟁에 실패는 있어도 굴복은 없다는 눈빛.
이 시기에 널리 퍼졌던 노래가 녹두장군 전봉준의 처형뒤 온나라에 퍼졌던 노래.
남겨진 조선의 백성은 울고간다.
지고 또 져도 다시 피는 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백성의 역사.
비바람에 찢어지고 서릿발에 얼어붙고 잠긴 방과 열린 거리에서 무고한 피가 흘러도 사람에서 사람으로 가지처럼 뻗어나간 저항의 노래.
그것은 우리 모두의 노래입니다.
역사는 계승되고 노래는 이어지고
조선의 민란, 결코 패배하지 않은 역사입니다.
<출처: jtbc 차이나는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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