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교시, 조선시대의 경연, 경연이 작동하지 않은 시대의 비극
1455년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제7대 왕 세조, 당시의 사건이 사육신으로 1456년 단종 복위를 도모한 6명의 관리죠. 정통성이 없는 세조를 몰아내자, 하지만 결국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사육신, 집현전을 중심으로 일어난 단종 복위 운동을 합니다.
단종 복위 운동으로 죽임당한 사육신, 세조의 왕위 찬탈 후 벼 술을 버린 생육신은 과거 응시도 거부했고,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독특한 방식의 경연을 시도한 세조,
세조의 독특한 경연 방식은 친강입니다. 지금 사례는 문신대상의 친강인데 세조의 친강 대상은 1. 문신 2 무관 3. 종친. 4. 성균관 유생이에요. 함께 배우고 토론하는 것이 아닌 본인이 친강 하는 형태, 경연이 아닌 강연이죠.
세조가 친강에 나선 이유는? 찬탈의 정당화 작업을 위해서입니다. 이념 통제의 수단이 아니었을까? 임금이면서 스승을 자처한 세조, 경연을 통한 배움은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죠. 권력의 쏠림 방지 장치인 거예요. 임금이자 스승인 거죠. 소통이 아닌 주입, 독재로 향하는 정치적 폐단으로 작동한 거죠. 주입식 친강을 통해 찬탈의 정당화를 꾀한 세조의 위험성
왕 혼자의 생각으로 지혜로 지식으로 민생과 국정을 파악할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죠. 학자들의 지혜와 지식이 절실해진 시대인 거예요. 1455년부터 1468년까지 세조 재위 기간 동안 폐지된 집현전.
1469년 성종 즉위후 집현전을 다시 부활시키자, 성종 9년 1478년 경연 관청인 홍문관을 설립, 집다에 구슬 옥으로 집현전의 새 이름 홍문과 이 되죠. 집현전을 폐지한 사람은 할아버지 세조예요. 같은 이름을 그대로 쓰면? 할아버지의 행적을 부정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선왕을 부정하는 건 불효 중의 불효죠.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이름 바꾸기예요.
배움과 소통 경연의 취지는 그대로, 조직 구성도 그대로 유지, 홍문관은 대표적인 청직이에요. 가장 깨끗한 관직입니다. 홍문관 인재 선발 기준은 개인적인 인격결함과 조상중에 뇌물을 받은 사람은 탈락이라고 해요.
선발과정은 1. 과거시험 합격자 중에 2. 인사 담당자가 채점 후 선발한다고 해요. 등영록을 보면 홍문관 관리의 인적 사항이 기록된 책으로 홍문록은 혹은 본관록을 보면 홍문관에 적합한 인물에 투표하는 1차 추천 기록이 있습니다. 추천 점수순으로 명단을 정리해 도당록은 홍문록에 오른 자를 대상으로 투표하는 2차 추천 기록이 있습니다. 이 결과를 왕에게 올리면 득점 순위대로 그때그때 임명을 한다고해요. 어렵게 선발되는 만큼 주어지는 특전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연구년 사가독서는 휴가를 주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입니다. 모여서 공부할 때 나오는 시너지 효과 때문에 공부 공간도 따로 제공한다고 해요.
독서당은 지금의 옥수동에 위치해 있었다고 해요. 한남오거리가 옥수동에서 응봉 사거리까지 이어진 길의 이름이 독서당로로 되었죠. 한강 동호에 세워져 붙여진 이름이 동호대교입니다.
동호의 유래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 수역이 넓고 호수처럼 잔잔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해요. 독서당은 실제로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합니다.
서연이란? 장차 국왕이 될 왕자를 교육하는 제도죠. 청소가 모든 공부의 기본으로 이불 개고 세수하는 것부터 학습을 한다고 해요.
세자에 책봉되면 이 루틴으로 바로 돌입하게 된다고 해요. 세자가 공부하는 장면을 그린 회강 반차도(1819년 효명세자의 회강)가 있는데 반차도는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이죠.
세자는 어떤 기록에도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죠. 세자를 가르치는 관청도 존재합니다. 경연 관청= 홍문관, 서연 관청은 세자시강원이에요. 세자의 스승은 스승 사= 영의정 가르 치불= 좌의정과 우의정. 무협영화 단골 호칭인 사부와 같죠.
세자는 입학식도 진행합니다.
세자의 입학식은 입학례로 성균관 스승에게 제자로서 예를 올리는 예식입니다. 성균관에서 입학식 후 공부는 동궁에서 진행한다고 해요. 단 한 명의 세자를 위한 행사라고 해요.
폭군의 시대라 불린 연산군, 조선 제10대 왕 재위 1494년부터 1506년까지.
연산군이 경연에 빠지기 위해 둘러댄 핑계는 뭘까요?
전에 다 끝내지 못하는 이미 진도가 밀린 상황이죠. 차마 안 하겠다는 말은 못 하고 아프다고 하죠. 그런데 아프다고 한날 잔치엔 나가요. 나랏일은 관심 밖이고 매일 잔치를 열어 즐겼다는 기록이 있죠. 아프다는 핑계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라고 해요. 계속 경연을 미루다가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사상 초유의 대리출석.
원래 경연은 하루 세 번인데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나오라고 하지만 아프다고 계속 불참, 그러다 어느 날 신하들에게 시를 한편 지어 보낸 연산군.
그 결과 두 차례에 걸친 끔찍한 사화가 발발합니다. 증조부인 세조를 비판한 기록을 입수해서 읽은 연산군, 분노한 연산군의 대응은 김일손이라는 자를 당장 잡아 오라고 하죠. 연산군 4년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납니다. 왕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신진사대부를 대거 처형하고 파면한 사건이죠.
1482년 사약을 받고 죽은 어머니 폐비 윤 씨, 1504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자신의 어머니를 폐위시키는 일에 관여한 사람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죠. 1504년 갑자사화 후 경연은 정말 폐지됩니다. 1506년 갑자사화 2년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죠.
광해군 재위 15년 중 경연을 연 일수는? 재위 15년중 10일이라고 해요. 조선실록에서 검색되는 건 약 100회 정도 거의 경연 중단이 대부분이었다고 해요. 즉위한 지 어언 3년 만에 드디어 경연에 참석하게 되죠. 기록에 따르면 광해군은 좌도에 심히 미혹됐었다고 해요.
광해군은 친국 때문에 경연 참여를 안 했는데 친국이란 조선시대 임금이 친히 중죄인을 심문하던 일이라고 해요. 보고 받고 판단하는 걸 하지 친국 장소에 잘 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열심히 나갑니다. 조선실록에 등장하는 친국이 1268건이라고 해요. 이중 광해군이 340여 건이에요. 어쨌든 재위 기간 내내 각종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고 귀양 보내고 왕이 즉위한 후로 경연을 연적이 없었고 매양 병 때문이라 했지만
이쯤 되면 신하들도 체념을 하죠. 바른말하던 신하들은 처형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고 궁궐 등 토목 공사로 인한 재정이 파탄되고 벼슬을 돈으로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횡행, 나라가 어지러워지면서 점점 더 피폐해져 간 백성의 삶. 서로 소통하고 회의하는 자리는 안 열리고 문고리 권력들이 판치는 상황이죠. 그 결과는? 광해군이 맞이하는 비극적인 최후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게 되죠. 연산군에 이어 반정으로 폐위된 두 번째 왕으로 기록되어 있죠. 꼭 경연 때문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정치 전체를 망가뜨리고 혼란에 빠트리는 유력한 기제가 된 거라고 해요.
경연의 부재로 인한 불통, 다양한 정치 상황이 맞물려 빚어낸 비극의 시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경연은 어떤 의미일까?
경연은 역사적 산물이고 동일하게 반복된 순 없죠. 조선시대 경연의 핵심은 함께 배우며 토론을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모색하는 거예요. 경연 중심의 축은 소통, 학습, 공론입니다. 어떤 시대든 평화로운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장치라고 해요.
21세가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소통하고 학습하고 공로화하는 과정이 시민 사회 곳곳에서 이뤄진다면 그 자체가 오늘날의 경연이 아닐까.
<출처: jtbc 차이 나는 클라스>
댓글